메이지·다이쇼
근대화와 국제 관계
AI가 작성한 글기준 2026-09
새 나라를 만들다
1868년 에도 막부가 끝나고 메이지 천황을 중심으로 한 새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이것을 메이지 유신이라고 합니다. 정부는 서양처럼 힘센 나라를 만들겠다며 철도를 놓고, 학교를 세우고, 군대를 새로 만들었습니다. 천황이 사는 곳도 교토에서 도쿄(에도의 새 이름)로 옮겼습니다.
헌법과 의회
1889년에는 헌법을 만들고, 이듬해에 국회(제국의회)를 열었습니다.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헌법과 의회를 갖춘 나라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헌법에서는 천황의 힘이 아주 컸습니다.
전쟁에서 이긴 일본
일본은 1894년에 청나라와 싸워 이겼고(청일전쟁), 1904년에는 러시아와 싸워 이겼습니다(러일전쟁). 이 뒤 일본은 이웃 나라에 힘을 뻗쳤습니다.
한국과 일본
일본은 1905년에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고, 1910년에는 대한제국을 강제로 식민지로 만들었습니다. 우리 겨레는 1945년 광복까지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1909년에는 안중근 의사가 중국 하얼빈에서 일본의 정치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습니다. 1919년에는 온 나라가 3·1 운동으로 독립을 외쳤습니다.
다이쇼 시대
1912년 다이쇼 천황이 즉위했습니다. 이 시기에는 사람들이 정치에 참여하려는 목소리가 커졌습니다(다이쇼 데모크라시). 1923년에는 도쿄 일대에 간토 대지진이 일어나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메이지 유신
1868년 「5개조 서약문」을 발표해 여론을 존중하고 서양의 지식을 받아들이겠다고 밝혔습니다. 에도는 도쿄로 이름이 바뀌었고 1869년 천황이 교토에서 도쿄로 옮겨 오면서 수도의 기능이 도쿄로 옮겨졌으며, 1871년 폐번치현으로 번을 없애고 현을 두어 중앙집권 체제를 이루었습니다. 신분제를 폐지하고(사민평등), 1872년 학제와 철도(신바시~요코하마), 1873년 징병령과 지조 개정을 시행했습니다. 「부국강병」과 「식산흥업」이 정부의 구호였습니다.
헌법과 정당 정치
자유민권운동이 국회 개설을 요구했고, 이토 히로부미 등이 독일 헌법을 참고해 1889년 대일본제국 헌법을 만들었습니다. 이 헌법은 천황이 주권을 가지며 통치권을 갖는 것으로 정했습니다. 1890년 첫 제국의회가 열렸습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1876년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구실로 조선과 강화도 조약을 맺어 개항시켰습니다.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을 계기로 조선에 군대를 보내 청과 전쟁(청일전쟁)을 벌였고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었습니다. 1904~1905년에는 러시아와 러일전쟁을 벌였고 포츠머스 조약으로 한반도에 대한 지배적 지위를 인정받았습니다.
한국 병합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두었으며(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 1909년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를 저격했습니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삼았고, 이 지배는 1945년까지 이어졌습니다. 한국은 이 조약들이 강제로 이루어진 것으로 원천 무효라는 입장이고, 1919년 3·1 운동은 이에 저항한 대표적 사건입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와 관동 대지진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산업이 성장했고, 1918년 하라 다카시의 정당 내각이 들어섰습니다. 1925년 25세 이상 남자의 보통선거법이 만들어졌지만 같은 해 사회 운동을 억누르는 치안유지법도 만들어졌습니다. 1923년 9월 1일 간토 대지진이 일어나 도쿄·요코하마가 큰 피해를 입었고, 혼란 속에서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는 헛소문이 퍼져 많은 조선인이 학살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일본 정부의 보고서에서도 다루어졌습니다.
메이지 유신의 성격
메이지 유신을 「시민 혁명」으로 볼지, 「위로부터의 근대화」로 볼지, 아니면 「개혁을 이끈 하급 무사 중심의 정치 변혁」으로 볼지는 학계에서 오랫동안 논쟁이 이어졌다. 조슈와 사쓰마 출신의 번벌이 정부 요직을 차지해 정치가 이루어졌고, 이 점은 이후 자유민권운동과 충돌했다. 1873년 정한론 정쟁, 1877년 세이난 전쟁(사이고 다카모리)은 유신 정부 안의 갈등을 보여 준다.
대일본제국 헌법 체제
1889년 헌법은 천황을 신성불가침한 통치권자로 규정하면서도 의회와 내각의 틀을 갖추었다. 동시에 통수권 독립, 추밀원, 귀족원 같은 장치로 정당 정치를 제한할 여지가 컸다. 학자마다 「입헌주의적 성격」을 강조하기도 하고 「천황 주권」을 강조하기도 한다. 1890년 교육칙어는 국민 도덕의 기준으로 기능했다.
청일·러일전쟁과 한반도
일본의 대외 팽창에서 한반도는 핵심 지역이었다. 1875년 운요호 사건, 1876년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으로 조선은 개항했고 불평등한 조항을 받아들였다. 청일전쟁의 결과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조선의 「독립」이 확인되고 랴오둥 반도와 타이완이 할양되었으나, 삼국 간섭으로 랴오둥은 반환되었다. 러일전쟁 후 포츠머스 조약(1905)으로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지도·보호·감리 권한을 얻었다.
을사늑약과 병합을 둘러싼 논쟁
일본 정부는 1905년 을사조약(제2차 한일협약)과 1910년 병합조약을 당시 국제법상 유효한 것으로 다루었다. 반면 한국 측은 두 조약이 무력 위협과 강제 속에 체결되었고 황제의 비준이 없었다는 점 등을 들어 처음부터 무효라고 본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 제2조의 「이미 무효」라는 표현도 한국은 「애초부터 무효」로, 일본은 「한국 독립 이후 무효」로 해석해 왔다. 이 해석 차이는 지금도 남아 있는 쟁점이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그가 이토 저격의 동기를 설명하고 동아시아 평화 구상을 담은 미완의 저작이다.
다이쇼 시기의 명암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요시노 사쿠조의 민본주의, 정당 내각, 보통선거 요구로 대표되지만, 같은 시기 식민지에서는 3·1 운동(1919)이 일어났고 일본은 무단 통치에서 이른바 「문화 통치」로 방식을 바꾸었다. 간토 대지진 직후 계엄령 아래 조선인과 중국인이 학살된 사건은 자경단과 군·경찰이 관여했다고 일본 정부의 2009년 보고서에서도 서술되어 있으며, 정확한 희생자 수는 자료마다 차이가 커 확정되지 않았다. 이 시기의 민주화 요구와 제국주의적 팽창, 사회 통제(치안유지법)가 함께 존재했다는 점이 이 시대의 핵심 모순이다.
Sources · 참고 자료
- 「5개조 서약문」(1868년)
- 『대일본제국 헌법』(1889년)
- 「시모노세키 조약」(1895년)
- 「포츠머스 조약」(1905년)
- 「한일병합조약」(1910년)
- 「3·1 독립선언서」(1919년)
- 안중근 『동양평화론』
- 중앙방재회의 보고서 「1923 관동대진재」(200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