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카·나라
불교 전래와 율령 국가
AI가 작성한 글
불교가 들어오다
6세기에 백제의 왕이 일본에 불상과 불교 경전을 보내 주었습니다. 이때부터 일본에도 불교가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절을 짓고, 부처에게 기도하는 문화가 생겼습니다.
쇼토쿠 태자
7세기 초에는 쇼토쿠 태자가 나라를 이끌었습니다. 태자는 관리들의 등급을 정하고, 「서로 화합하는 것을 귀하게 여겨라」라는 내용이 든 17조 헌법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수나라에 사신을 보냈습니다. 또 오늘날 나라현에 있는 호류지라는 절도 태자와 관계가 깊다고 전해집니다.
나라를 새로 고치다
645년에는 왕실을 위협하던 강한 힘을 가진 가문을 물리치고 나라를 새로 고치는 개혁을 했습니다. 땅과 사람을 나라가 관리하는 방식으로 바꾸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개혁을 다이카 개신이라고 합니다.
백제를 도우러 갔다가
663년에 일본은 신라와 당나라에 무너진 백제를 돕기 위해 바다를 건넜습니다. 하지만 백강이라는 곳에서 크게 졌습니다. 그 뒤 많은 백제 사람이 일본으로 건너가 살았습니다.
새 도읍, 헤이조쿄
710년에는 법과 제도가 갖춰진 나라의 중심으로 헤이조쿄(오늘날 나라)라는 새 도읍을 세웠습니다. 일본 최초의 역사책 『고사기』와 『일본서기』도 이때 만들어졌습니다. 752년에는 나라에 있는 도다이지에 커다란 청동 대불을 세우는 행사가 열렸습니다.
불교 전래와 소가 씨
백제의 성왕이 불상과 경전을 보냈다고 전하며, 시기는 538년설(일본 절의 기록)과 552년설(『일본서기』)로 나뉩니다. 불교를 받아들이자는 소가 씨와 반대하는 모노노베 씨가 대립했고, 587년 소가 씨가 승리하면서 소가 씨가 정치를 이끌었습니다. 592년에는 최초의 여성 천황 스이코가 즉위했습니다.
쇼토쿠 태자의 개혁
스이코 천황의 조카 쇼토쿠 태자는 593년부터 정치를 맡았습니다. 603년 관위 12계로 능력에 따라 관리를 뽑는 길을 열었고, 604년 17조 헌법으로 관리가 지켜야 할 도리를 밝혔습니다. 607년에는 견수사를 보내 중국과 대등한 외교를 하려 했습니다. 이때 국서에서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 지는 곳의 천자에게」라고 쓴 것이 수 양제를 불쾌하게 했다는 기록이 『수서』에 있습니다.
다이카 개신과 백강 전투
645년 나카노오에 황자와 나카토미노 가마타리가 소가 씨를 무너뜨렸고, 이듬해에는 땅과 백성을 나라의 것으로 하는 개혁의 방침이 발표되었습니다. 이 개혁 뒤 일본은 당의 제도를 본떠 중앙집권 국가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660년 백제가 멸망하자 왜는 백제 부흥 운동을 돕기 위해 군대를 보냈고, 663년 백강 전투에서 당·신라 연합군에 크게 패했습니다. 이 패전 뒤 규슈 북부에 다자이후를 지키는 방어 시설(미즈키 등)을 만들었고, 많은 백제 유민이 일본에서 관료와 기술자로 활동했습니다.
율령 국가의 완성
임신의 난(672)에서 승리한 덴무 천황(재위 673~686)은 천황 중심의 통치 체제를 강화했고, 701년 다이호 율령으로 관제·토지·세금 제도를 갖추었습니다. 호적을 만들고 백성에게 논을 나누어 주고 세금을 걷는 방식입니다. 710년 헤이조쿄로 도읍을 옮겼고, 712년 『고사기』, 720년 『일본서기』가 완성되었습니다. 『만엽집』은 8세기 후반에 엮인 일본 최고(最古)의 시가집입니다.
불교 국가 나라 시대
8세기의 쇼무 천황은 전국에 국분사를 세우게 하고 도다이지 대불을 만들게 했으며, 752년 대불 개안 공양에는 인도와 당 등에서 온 승려도 참석했다고 전합니다.
불교 공식 전래와 정치 갈등
『일본서기』는 552년, 다른 사료(『상궁성덕법왕제설』, 『원흥사가람연기』)는 538년에 백제 성왕이 불상과 경전을 보냈다고 전한다. 어느 쪽이든 백제와의 교류가 불교 수용의 통로였다. 소가씨와 모노노베씨의 갈등은 불교 신앙 문제이면서, 외래 문화와 대륙과의 통교를 담당한 씨족과 기존 제사를 담당한 씨족의 권력 다툼으로도 해석된다. 이 시기 고구려 승려 혜자, 백제 승려 관륵 등이 불교와 역법 같은 지식을 전했다고 전해진다.
쇼토쿠 태자의 실체 논쟁
『일본서기』가 그리는 쇼토쿠 태자의 업적(관위 12계, 17조 헌법, 견수사 등)은 후대의 미화가 섞였다는 비판이 있다. 특히 17조 헌법은 문체와 용어를 이유로 『일본서기』 편찬 단계의 윤색이라는 견해가 있고, 「쇼토쿠 태자」라는 호칭 자체가 사후에 만들어졌다는 점도 지적된다. 그렇더라도 607년 견수사와 그 국서가 대등한 외교를 지향했다는 점은 『수서』 왜국전으로도 확인되므로, 대륙 국가와의 관계를 재설정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점은 인정된다.
백강 전투와 동아시아 국제 전쟁
660년 당·신라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키자 백제 유민이 부흥 운동을 일으켰고, 왜는 왕자 풍(豊璋)을 옹립해 대규모 수군을 보냈다. 663년 백강 어귀에서 왜·백제 부흥군은 당 수군에 패했다. 『삼국사기』도 이 전투를 기록하고 있다. 이 패전으로 왜는 국가 존망의 위기감을 느껴 규슈에 미즈키·오노성 등을 쌓고 율령 정비를 서둘렀다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백제 유민의 이주는 이후 일본 관료·기술 체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율령 국가의 구조와 한계
다이호 율령은 당의 율령을 참고했지만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니다. 일본은 당의 과거제나 환관 제도를 도입하지 않았고, 고유의 신기관(神祇官)을 태정관과 나란히 두는 등 독자적 특색을 보였다. 구분전을 나누어 주고 조·용·조를 걷는 공지공민제는 8세기 중반부터 흔들려 743년 간전영년사재법으로 개간지의 사유가 인정되며 이후 장원 발전의 길이 열렸다. 즉 율령 국가는 완성되는 순간부터 변질되기 시작한 체제였다.
「천황」과 「일본」의 성립
「천황」이라는 칭호와 「일본」이라는 국호의 사용은 덴무·지토 시기에 정착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이러한 통치 이념을 뒷받침하는 역사서로 편찬되었으며, 신화와 역사를 하나로 엮어 왕권의 정통성을 밝히려는 의도가 강하다는 점을 감안해 사료 비판이 필요하다.
Sources · 참고 자료
- 『일본서기』(720년 완성)
- 『고사기』(712년 완성)
- 『속일본기』
- 『수서』 왜국전
- 『삼국사기』 백제본기·신라본기
- 『만엽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