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쿠보 도시미치
메이지 정부의 초기 정책을 이끈 사쓰마 출신 정치가
AI가 작성한 글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는 메이지 정부 초기에 나라의 방향을 정한 정치가입니다. 지금의 가고시마현인 사쓰마 번 출신으로, 사이고 다카모리, 기도 다카요시와 함께 「유신 3걸」로 불립니다. 막부를 무너뜨리는 데 힘을 보탰고, 정부가 세워진 뒤에는 서양 나라들을 시찰한 경험을 바탕으로 산업을 키우는 정책을 밀고 나갔습니다. 1873년에는 새로 만들어진 내무성의 책임자가 되어 정부의 중심에 섰습니다. 그러나 1878년 도쿄에서 반대 세력의 습격을 받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도시미치는 1830년 사쓰마 번의 하급 무사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부터 사이고 다카모리와 가깝게 지냈고, 번의 실력자 시마즈 히사미쓰에게 신임을 얻어 번 정치에 참여했습니다. 1866년 사쓰마와 조슈의 동맹, 이듬해의 왕정복고에서 사이고와 함께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메이지 정부에서는 폐번치현을 추진했고, 1871년에는 대장경(재정 책임자)으로서 이와쿠라 도모미를 대표로 하는 사절단에 참여해 미국과 유럽을 돌아보았습니다. 산업과 제도가 발전한 서양을 직접 보고 돌아온 그는 나라의 힘을 키우는 일이 우선이라고 생각했고, 이를 「식산흥업」 정책으로 이어 갔습니다. 1873년 귀국해서는 사이고를 조선에 사절로 보내 무력을 배경으로 개국을 압박하자는 정한론에 반대했습니다. 그는 내정이 먼저라는 입장이었는데, 이 논의가 결말이 나면서 사이고와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이 정부를 떠났습니다. 같은 해 그는 새로 만든 내무성의 책임자(내무경)가 되었습니다.
이후 사가의 난 진압과 1874년의 타이완 출병 뒤처리를 위한 청나라와의 교섭 등을 맡았고, 1875년 운요호 사건(강화도 사건)을 일으켜 이듬해 조선에 불평등한 조일수호조규를 맺게 한 것도 그가 정부를 이끌던 때였습니다. 1877년에는 사이고가 이끈 서남 전쟁을 진압했고, 이듬해인 1878년 5월 도쿄의 기오이자카에서 반정부 무사들에게 암살되었습니다.
도시미치는 신중하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성격으로 전해지며, 이 점이 사이고의 소탈한 인상과 자주 대비됩니다. 정부 안에서 그의 영향력이 매우 커서 이 시기를 「오쿠보 정권」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도시미치는 「메이지 정부의 실질적 설계자」로 흔히 평가되지만, 이 평가에는 두 가지 차원이 섞여 있다. 하나는 중앙집권 체제와 산업 육성을 추진한 행정가로서의 면모다. 내무성을 중심으로 지방 행정, 경찰, 권업(산업 장려), 박람회 등을 이끌었고, 1877년 도쿄 우에노에서 열린 제1회 내국 권업 박람회가 그 사례다. 다른 하나는 반대 세력을 강하게 누른 권력자로서의 면모로, 사가의 난 등을 진압한 방식은 엄격했다는 평가와 필요한 조치였다는 평가로 갈린다.
한국 독자에게 중요한 정한론과의 관계는 신중하게 봐야 한다. 도시미치가 정한론에 반대한 이유는 조선 침략이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고 여겨서가 아니라, 국내 개혁과 재정, 외교 여건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고 설명된다. 실제로 그가 정부를 이끈 시기에 일본은 1875년 운요호 사건을 일으켰고, 1876년 조선과 불평등한 조약을 맺어 개항을 강요했다. 따라서 그를 「전쟁 반대론자」로만 규정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으며, 대외 팽창의 시점과 방식을 둘러싼 견해차였다는 해석이 널리 받아들여진다.
인물 평가에서는 사이고 다카모리와의 관계도 자주 다루어진다. 두 사람은 어릴 적 친구였으나 정한론 논쟁 이후 정치적으로 갈라섰고, 사이고가 서남 전쟁에서 패해 죽은 이듬해 도시미치도 암살되었다. 이 때문에 「유신의 두 영웅의 엇갈린 운명」으로 이야기되지만, 이는 극적으로 정리된 서사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는 정책과 국가 구상에서 오랜 차이가 누적되었다고 보는 편이 사료에 가깝다. 그를 평가할 때는 사료로 확인되는 정책 성과와, 후대의 영웅담이 만든 이미지를 구별해서 읽어야 한다.
암살범들이 남긴 글에는 그가 독재적으로 정치를 운영했다는 비판이 담겼다고 알려져 있어, 당대에도 그의 정치 방식에 대한 반발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이 반발이 개인에 대한 원한이었는지, 정부의 정책 전반에 대한 저항이었는지를 나누어 보는 것이 필요하다.
Sources · 참고 자료
- 『오쿠보 도시미치 문서(大久保利通文書)』(일본사적협회, 1927~1929년)
- 『오쿠보 도시미치 일기(大久保利通日記)』
- 구메 구니타케 『특명전권대사 미구회람실기』(187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