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
약 260년의 평화와 서민 문화
AI가 작성한 글
260년의 평화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를 열었습니다. 「에도」는 지금의 도쿄입니다. 이 뒤로 약 260년 동안 큰 전쟁 없이 평화가 이어졌습니다.
다이묘와 사농공상
전국의 영주 다이묘는 1년씩 번갈아 에도와 자기 땅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이것을 참근교대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무사, 농민, 장인, 상인으로 신분이 나뉘어 살았습니다.
문을 닫고 나라를 지키다
막부는 기독교를 금지하고, 서양과는 네덜란드하고만 나가사키 앞바다의 작은 섬 데지마에서 무역하게 했습니다. 다른 나라와의 왕래를 크게 줄이는 이 정책을 흔히 쇄국이라고 합니다. 그래도 조선과는 오가며 교류했습니다. 조선은 주로 새 쇼군이 나올 때 축하 사절단 조선통신사를 보냈습니다.
서민이 즐기는 문화
이 시대에는 도시 사람들이 즐기는 문화가 크게 발달했습니다. 가부키(연극), 화려한 그림 우키요에, 짧은 시 하이쿠가 인기였습니다. 하이쿠의 대가 마쓰오 바쇼와 그림 「후가쿠 삼십육경」의 가쓰시카 호쿠사이가 유명합니다.
검은 배가 오다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커다란 검은 배를 타고 와서 「문을 열라」고 요구했습니다. 막부는 결국 1854년 나라의 문을 열었고, 그 뒤 나라 안이 크게 흔들렸습니다. 1867년 마지막 쇼군이 나라를 다스릴 힘을 천황에게 돌려주었습니다.
막번 체제
에도 막부는 직접 다스리는 땅(천령)을 가지고, 나머지 땅은 약 260개의 번으로 나누어 다이묘가 다스리게 했습니다(막번 체제). 1615년 무가제법도로 다이묘를 통제했고, 1635년 3대 쇼군 이에미쓰가 다이묘의 참근교대를 법으로 정했습니다. 이 제도는 다이묘에게 큰 비용을 쓰게 하는 한편 가도와 도시 발전을 이끌었습니다. 신분제도 굳어져 무사, 농민, 장인, 상인이 각자 역할을 했습니다.
이른바 쇄국
막부는 기독교를 금하고 무역을 통제했습니다. 1637년 규슈의 시마바라·아마쿠사에서 기독교 신자와 농민이 봉기한 시마바라의 난을 진압한 뒤(1638), 1639년 포르투갈선 내항을 금지했습니다. 1641년에는 네덜란드 상관을 나가사키의 데지마로 옮겼습니다. 나가사키(네덜란드·중국), 쓰시마(조선), 사쓰마(류큐), 마쓰마에(아이누)라는 네 창구로 대외 관계를 관리했습니다.
조선통신사
임진왜란 이후 끊어졌던 조선과의 국교가 회복되어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번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했습니다. 수백 명이 한양에서 에도까지 오가며 시문과 학문을 주고받았고, 일본 사람들에게는 큰 구경거리였습니다. 쓰시마의 소 씨가 외교와 무역을 중개했습니다.
서민 문화의 꽃
5대 쇼군 쓰나요시 시대(17세기 말~18세기 초)에는 오사카·교토의 상인이 주도한 겐로쿠 문화가 꽃피었습니다. 이하라 사이카쿠의 소설, 지카마쓰 몬자에몬의 인형극 대본, 마쓰오 바쇼의 하이쿠가 대표적입니다. 19세기 초에는 에도 서민 중심의 가세이 문화가 나타났고 우키요에가 인기였습니다. 서당(데라코야)이 늘어 글을 읽는 사람이 많았고, 네덜란드어로 서양 학문을 배우는 난학도 발전했습니다(1774년 『해체신서』).
개항과 막부의 종말
1853년 페리가 이끄는 미국 함대(흑선)가 우라가에 도착했고, 1854년 미일화친조약으로 시모다와 하코다테를 열었습니다. 1858년 여러 나라와 불평등한 통상조약을 맺자 막부 비판이 커졌고, 존왕양이 운동과 사쓰마·조슈 번의 개혁 세력이 성장했습니다. 1866년 삿초 동맹이 맺어졌고, 1867년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대정봉환으로 통치권을 천황에게 돌려주었습니다. 1868년 보신 전쟁을 거쳐 막부 세력이 물러났습니다.
근세 국가론과 막번 체제
에도 시대의 성격을 「봉건제」로 볼지, 「근세 국가」로 볼지 학계에서 논의가 있다. 쇼군은 전국의 군사 통수권과 다이묘 통제권을 쥐었지만 번은 내정에서 상당한 자율성을 가졌다. 신분제도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농공상」이 실제 서열을 뜻하는지, 직능에 따른 구분인지 최근 연구는 재검토하고 있다. 신분 체계 바깥에 놓여 차별받던 사람들(당시 에타·히닌 등으로 불린 신분)의 문제는 근대의 부락 차별로 이어졌다.
「쇄국」 개념의 재검토
「쇄국」이라는 말은 19세기 초 시즈키 다다오가 켄페르의 책을 번역하면서 만든 말이며, 당대 막부가 이 말을 쓴 것은 아니다. 근래 연구는 이 정책을 「완전한 폐쇄」가 아니라 막부가 대외 관계와 무역을 독점하고 관리한 체제(해금 체제)로 이해한다. 나가사키, 쓰시마, 사쓰마, 마쓰마에의 「네 창구」로 조선·류큐·네덜란드·중국·아이누와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이 체제의 성립 이유로는 기독교 금지와 함께 무역 이익 통제, 국제 질서 속에서 막부 권위를 높이려는 의도 등이 거론된다.
조선통신사와 조일 관계
통신사는 1607년(회답겸쇄환사)부터 1811년까지 12회 파견되었으며, 첫 세 번은 임진왜란 이후의 포로 송환을 포함한 회답겸쇄환사의 성격이었다. 1719년 통신사의 제술관이었던 신유한의 『해유록』은 일본의 풍속과 인물을 세밀하게 기록한 대표적 사료이다. 통신사가 지나는 곳마다 일본 문인과의 창화(시문 주고받기)가 이루어졌으며, 일본 서민의 관심도 컸다. 한편 이 교류에 대해서는 「선린 우호」를 강조하는 시각과, 두 나라가 서로 다른 의미를 부여했다는 시각이 있다. 조선은 통신사를 대등한 이웃 사이의 교린 사절로 보았고, 막부는 이를 쇼군의 권위를 높이는 행사로 활용했다는 해석이 그것이다. 이러한 인식 차이가 함께 존재했다는 점을 보아야 한다.
경제 성장과 3대 개혁
에도 시대에는 농업 생산과 상업이 크게 성장해 도시 인구가 늘었고, 에도는 18세기에 세계 최대급 도시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막부와 번은 재정난에 시달렸고 교호(요시무네), 간세이(마쓰다이라 사다노부), 덴포(미즈노 다다쿠니)의 3대 개혁으로 대응했으나 근본적 해결에는 이르지 못했다.
개항과 막말 정치
페리 내항(1853)은 막부의 대외 인식이 크게 흔들리는 계기가 되었다. 막부가 조정의 칙허 없이 1858년 통상조약을 맺은 일은 「천황의 권위」를 정치 쟁점으로 끌어올렸다. 이이 나오스케가 반대파를 탄압한 안세이 대옥(1858~1859)과 그의 암살(1860)은 막부 권위의 추락을 보여 준다. 1867년 대정봉환과 이어진 왕정복고(1868년 1월)는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이 「불가피한 근대화」였는지, 외압과 국내 정치가 맞물린 우연한 결과였는지는 지금도 논쟁이 이어진다.
Sources · 참고 자료
- 『무가제법도』(1615년, 1635년 개정)
- 마쓰오 바쇼 『오쿠노호소미치』(1702년 간행)
- 신유한 『해유록』(1719년 통신사 기록)
- 스기타 겐파쿠 등 『해체신서』(1774년)
- 「미일화친조약」(1854년)
- 『조선왕조실록』(통신사 관련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