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이에미쓰
막번 체제를 굳힌 3대 쇼군
AI가 작성한 글
도쿠가와 이에미쓰(徳川家光)는 에도 막부의 세 번째 쇼군입니다. 이에야스의 손자로, 태어날 때부터 「쇼군이 될 사람」으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이에미쓰는 막부의 힘을 확실히 굳힌 쇼군입니다. 다이묘(영주)들이 1년은 에도에서, 1년은 자기 영지에서 지내게 하는 참근교대를 법으로 정했습니다. 또 외국과의 교류를 크게 줄여 오직 몇 나라와 정해진 항구에서만 무역하게 했습니다. 이것을 흔히 쇄국이라고 합니다.
이에미쓰 시대에도 조선에서 사절단이 일본을 찾아왔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쇼군
이에미쓰는 1604년 2대 쇼군 히데타다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동생 다다나가와 후계 자리를 두고 부모의 마음이 흔들린 적이 있었으나, 할아버지 이에야스가 장남 이에미쓰를 후계자로 정해 주었다고 전해집니다. 1623년 쇼군이 되었고, 아버지가 죽은 1632년부터 직접 정치를 이끌었습니다.
막번 체제의 완성
1635년 무가제법도를 고쳐 다이묘가 격년으로 에도와 영지를 오가는 참근교대를 의무로 정했습니다. 다이묘들의 재정을 소모시켜 막부에 도전하기 어렵게 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로주, 와카도시요리 같은 막부의 통치 기구도 정비했습니다.
기독교 금지와 쇄국
1637~1638년 규슈 시마바라·아마쿠사에서 기독교 신자와 굶주린 농민이 일으킨 시마바라의 난을 진압한 뒤 기독교 금지를 더욱 강화했습니다. 1633년부터 1639년까지 여러 차례 명령을 내려 일본인의 해외 출입을 금지하고 포르투갈 배의 내항을 금지했으며, 1641년 네덜란드 상관을 나가사키의 데지마로 옮겼습니다. 조선과의 관계는 쓰시마 번, 중국과 네덜란드와의 관계는 나가사키에서 이어 갔습니다.
조선 통신사
이에미쓰 시대에는 조선에서 통신사가 여러 번 왔습니다. 1636년에는 병자호란이 일어난 해에 조선의 사절이 일본을 방문했고, 1643년에는 이에미쓰의 아들 이에쓰나의 탄생을 축하하는 사절이 왔습니다. 1651년 이에미쓰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쇄국」의 개념과 실제
이른바 「쇄국」은 후대에 만들어진 용어로, 이에미쓰 시대에는 나라를 닫았다기보다 무역과 외교를 막부가 독점하는 체제로 정리한 것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네 개의 창구」(나가사키의 네덜란드·중국, 쓰시마 번을 통한 조선, 사쓰마 번을 통한 류큐, 마쓰마에 번을 통한 아이누)가 있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금지, 막부의 무역 독점, 해외 도항 금지 등이 주된 이유로 거론된다. 다만 쇄국령이라 불리는 여러 법령이 하나의 통일된 정책이었는지, 시마바라의 난이 결정적 계기였는지에 대해서는 학계의 논의가 계속된다.
참근교대와 다이묘 통제
참근교대는 이에미쓰 시대에 제도화되었으나 그 뿌리는 이미 이전 시대의 인질 관행에 있다고 설명된다. 다이묘의 처자식을 에도에 살게 하는 것은 사실상의 인질 제도였다. 이 제도는 도로와 숙박 시설의 발달, 에도와 지방 사이의 문화 교류를 촉진한 부수 효과가 있었고, 동시에 다이묘 재정에 큰 부담이 되었다. 이에미쓰의 개인적 성격이 이 정책에 얼마나 반영되었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조선과의 관계와 야나가와 사건
이에미쓰 시대 조일 관계의 중요한 사건은 1635년의 야나가와 사건이다. 쓰시마 번이 조선과의 국서를 위조한 사실이 번 내부의 다툼 끝에 폭로되었고, 이에미쓰가 직접 재판에 관여해 쓰시마 번주 소 요시나리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고 가신 야나가와 시게오키를 유배했다. 이 판결로 쓰시마 번이 조선과 무역과 외교를 맡는 관계가 유지되었고, 조선과의 국서 표기에서 일본 국왕 대신 「대군」 칭호를 쓰는 등 외교 형식이 바뀌었다는 설명이 있다. 조선 통신사는 이처럼 쓰시마 번의 중개 아래 이어졌다.
이에미쓰 시대에 막부 관료제가 정비되어 쇼군 개인의 능력에 크게 의존하지 않고도 정치가 돌아가는 구조가 만들어졌다는 평가가 있다. 이는 이후 어린 쇼군이 즉위해도 막부가 유지된 배경으로 설명된다.
Sources · 참고 자료
- 『무가제법도』(1635년 개정)
- 『도쿠가와 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