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쿠라·무로마치
무사 정권의 시작
AI가 작성한 글
무사가 나라를 다스리다
1185년 무렵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전국에 무사를 보내 나라를 지키게 했습니다. 1192년에는 「쇼군」이라는 높은 벼슬을 받았습니다. 쇼군은 무사들의 우두머리입니다. 쇼군이 다스리는 나라의 중심은 바닷가 마을 가마쿠라였습니다. 이것을 가마쿠라 막부라고 합니다. 이제 무사가 나라를 다스리는 시대가 열렸습니다.
몽골이 쳐들어오다
13세기에 세상에서 가장 큰 나라였던 **몽골(원나라)**이 일본에 두 번 쳐들어왔습니다(1274년, 1281년). 이때 고려도 몽골에 끌려가 배를 만들고 군사를 보내야 했습니다. 일본 무사들은 열심히 막았고, 큰 태풍이 몰아쳐서 몽골의 배가 많이 부서졌습니다. 하지만 전쟁을 해도 얻은 땅이 없어서 무사들에게 나눠 줄 상이 부족했고, 막부는 점점 약해졌습니다.
새 막부와 아름다운 절
1333년에 가마쿠라 막부가 무너졌고, 1336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교토에 무로마치 막부를 세웠습니다.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금빛으로 빛나는 **금각(킨카쿠지)**을 지었습니다. 이 시대에는 노(能) 같은 연극과 차를 마시는 예절인 다도도 발달했습니다.
나라가 어지러워지다
1467년 쇼군의 뒤를 잇는 문제로 큰 전쟁 오닌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교토가 불에 타 폐허가 되었고, 그 뒤 일본은 전국에서 싸움이 끊이지 않는 전국 시대로 들어갔습니다.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겐페이 전쟁에서 승리한 뒤 1185년 전국에 수호(치안·경비)와 지토(토지 관리)를 두는 권한을 조정에게서 얻었고, 1192년 세이이타이쇼군에 임명되었습니다. 막부는 쇼군과 고케닌(부하 무사)이 「은고(땅과 지위를 주는 은혜)」와 「봉공(전쟁에서 충성)」으로 맺어지는 관계를 바탕으로 했습니다. 요리토모가 죽은 뒤에는 요리토모의 아내 호조 마사코의 집안인 호조 씨가 집권(막부를 실제로 이끄는 지위)이 되어 정치를 이끌었습니다. 1221년 조큐의 난에서 고토바 상황이 막부를 무너뜨리려다 패했고, 이후 막부의 권위가 더욱 굳어졌습니다.
몽골의 침입
원(몽골)은 1274년(분에이의 역)과 1281년(고안의 역) 두 차례 일본을 공격했습니다. 원정군에는 고려군과 고려에서 만든 배가 큰 몫을 했습니다. 호조 도키무네가 이끄는 막부는 이를 막아 냈는데, 특히 1281년에는 큰 태풍이 원정군에 큰 피해를 주었습니다. 다만 방어전이었기 때문에 얻은 땅이 없어 무사들에게 충분한 상을 줄 수 없었고, 이것이 고케닌의 불만과 막부 쇠퇴의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막부의 멸망과 남북조
1333년 고다이고 천황의 뜻에 따라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닛타 요시사다 등이 막부를 무너뜨렸습니다. 하지만 고다이고 천황의 새 정치(겐무 신정)는 오래가지 못했고, 다카우지가 1336년 교토에서 새 천황을 세워 무로마치 막부를 열었습니다. 고다이고 천황은 요시노로 피해 따로 조정을 세웠고, 이렇게 두 조정이 맞선 시대를 남북조 시대(1336~1392)라고 합니다.
무로마치 막부의 전성기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1392년 남북조를 하나로 합쳤고, 명(明)과 감합 무역을 시작했으며 1397년 교토에 금각을 지었습니다. 이 시기 선종의 영향을 받은 수묵화, 다도, 꽃꽂이, 노와 교겐 같은 문화가 발달했습니다(무로마치 문화).
조선과의 관계
14세기에는 왜구가 고려와 조선 해안을 자주 침입했습니다. 조선은 1419년 대마도를 정벌(기해동정)하고, 이후 삼포(부산포·제포·염포)를 열어 일본 사람들이 오가며 무역할 수 있게 했습니다. 1443년에는 계해약조로 무역 규모를 정했습니다.
오닌의 난
1467년부터 11년간 이어진 오닌의 난은 쇼군 후계 문제와 유력 다이묘 사이의 대립이 겹쳐 일어났고, 교토가 크게 파괴되었습니다. 이후 막부의 통제가 약해지고 각지의 다이묘가 독자적으로 힘을 겨루는 전국 시대가 되었습니다.
가마쿠라 막부의 성격
가마쿠라 막부를 「최초의 무사 정권」으로만 보는 것은 단순하다. 막부는 조정을 대체하지 않고 공존했으며, 요리토모의 권력은 동국을 중심으로 한 군사·경찰 권한에서 출발했다. 수호·지토 설치의 범위와 시기(1185년)에 관해서는 논쟁이 있으며, 1192년 세이이타이쇼군 임명을 막부 성립의 기준으로 삼는 전통적 설명 대신 1180년대 전반을 이행 과정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우세하다. 호조 씨는 쇼군을 직접 하지 않고 집권으로서 권력을 잡았으며, 1232년 고세이바이시키모쿠는 무사 사회의 관습을 성문화한 법으로 평가된다.
몽골 침입과 「가미카제」 담론
『몽고습래회사』는 일본 측이 그린 전투 장면 기록이며, 『고려사』는 고려가 원의 원정 준비(선박 건조·병력 동원)에 동원된 과정을 전한다. 1281년 태풍이 원정군에 큰 피해를 준 것은 확실하지만, 「신의 바람(가미카제)」이 일본을 구했다는 서술은 후대에 강조된 담론이다. 실제로 일본의 방어 체계(석루 축조 등)와 원정군의 준비 부족이 함께 작용했다는 해석이 있다. 삼별초가 1271년 일본에 보낸 것으로 알려진 국서의 성격을 둘러싸고도 학계 논쟁이 있으며, 이는 이 시기 동아시아 국제 관계를 다시 보게 하는 논점이다.
무로마치 막부와 다이묘 연합 정권
무로마치 막부는 가마쿠라 막부와 달리 교토에 있었고, 유력 수호 다이묘의 협력에 기댄 연합 정권의 성격이 강했다. 요시미쓰가 1392년 남북조를 통일하고 권위를 확립했으나, 지방에서는 수호 다이묘가 영지를 독점하는 수호 영국제로 발전했다. 요시미쓰는 명나라의 책봉을 받아 「일본 국왕」이라 칭하고 감합 무역을 시작했는데, 이는 국내에서 천황과의 관계를 둘러싼 논란거리가 되었다.
조일 관계
1419년 기해동정과 1443년 계해약조는 왜구 문제와 통교를 함께 관리하려던 조선의 정책을 보여 준다. 삼포의 왜관에서는 일본인이 무역하고 거주했고, 이 규정이 이후 삼포왜란(1510) 같은 갈등의 배경이 되었다. 이 관계는 일본 국내 정치 변동, 곧 막부와 다이묘, 쓰시마 소 씨의 이해 관계와 얽혀 있었다.
농촌의 변화와 오닌의 난
이 시기 농촌에서는 소손(자치 마을)이 성장하고 쓰치잇키(1428년 쇼초의 쓰치잇키 등)가 일어나 농민이 집단적으로 요구를 하는 힘을 보였다. 오닌의 난은 쇼군 후계 문제만이 아니라 다이묘 사이의 세력 다툼이 겹친 결과이며, 이 전쟁 뒤 막부는 이름만 남고 실질적인 권위는 무너졌다. 이런 이유로 학계는 오닌의 난을 중세에서 전국 시대로 넘어가는 시기로 본다.
Sources · 참고 자료
- 『아즈마카가미』
- 『태평기』
- 『몽고습래회사』(가마쿠라 시대 두루마리)
- 『고려사』(원의 일본 원정 관련 기록)
- 『세종실록』(계해약조 관련 기록)
- 제아미 『풍자화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