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전국 시대와 통일의 과정
AI가 작성한 글
싸움이 끊이지 않던 시대
오닌의 난(1467) 이후 일본에서는 쇼군의 힘이 약해졌습니다. 각 지방의 다이묘(영주)들은 자기 땅을 지키고 넓히려고 서로 싸웠습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이기는 일도 흔했습니다. 이 시대를 전국 시대라고 합니다.
새로운 물건이 들어오다
1543년에는 포르투갈 사람들이 일본에 조총(화승총)을 전해 주었습니다. 1549년에는 프란시스코 하비에르가 기독교를 전했습니다. 조총은 전쟁의 방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세 명의 통일 영웅
오다 노부나가는 조총을 잘 써서 강한 적들을 무찔렀지만, 1582년 부하의 배신으로 죽었습니다. 그 일을 이어받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농민 출신에서 일본 전체를 하나로 합쳤습니다(1590). 그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쟁에서 이겨 1603년 에도 막부를 열었습니다.
조선을 침략하다
히데요시는 일본을 통일한 뒤 1592년에 조선을 침략했습니다. 이것이 임진왜란입니다.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해 한양까지 빠르게 밀고 들어왔지만, 조선의 백성과 의병, 그리고 이순신 장군의 수군, 명나라의 도움으로 막혔습니다. 1597년에 다시 쳐들어온 전쟁(정유재란)까지 7년 동안 이어졌고, 조선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거나 일본으로 끌려갔습니다. 1598년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군은 물러났습니다.
하극상과 전국 다이묘
오닌의 난 이후 막부와 수호 다이묘의 권위가 무너지고, 신하가 주인을 누르고 일어서는 하극상이 널리 나타났습니다. 다케다 신겐, 우에스기 겐신, 모리 모토나리 같은 전국 다이묘는 자기 영지를 독자적으로 다스리며 서로 다투었습니다. 성 주변에 상인과 무사를 모아 살게 한 성하마을이 발달했습니다.
조총과 기독교
1543년 규슈 남쪽 다네가시마에 포르투갈인이 표류해 조총이 전해졌고, 일본은 곧 이를 직접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1549년에는 예수회 선교사 프란시스코 하비에르가 가고시마에 도착해 기독교를 전했습니다. 남만 무역은 다이묘에게 총과 화약 같은 이익을 주었습니다.
노부나가의 등장
오다 노부나가는 1560년 오케하자마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물리쳐 이름을 알렸고, 1568년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받들어 교토에 들어갔습니다. 1573년에는 요시아키를 쫓아내 무로마치 막부를 사실상 끝냈습니다.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는 조총을 많이 활용했다고 전해집니다. 낡은 관행이던 관문을 없애고 장사를 자유롭게 하는 정책(라쿠이치 라쿠자)을 폈습니다. 1582년 혼노지에서 부하 아케치 미쓰히데의 습격으로 죽었습니다.
히데요시의 통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미쓰히데를 물리치고 노부나가의 사업을 이었습니다. 1585년 관백이 되었고, 1588년 도수령으로 농민의 무기를 거두었으며 전국의 토지를 조사(검지)했습니다. 이로써 무사와 농민의 신분이 나누어졌습니다. 1590년 오다와라의 호조 씨를 굴복시켜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히데요시는 명을 정복하겠다는 목표로 조선에 길을 빌려 달라 요구했고, 조선이 거부하자 1592년 대군을 보냈습니다.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해 수도 한양까지 진격했지만, 이순신의 조선 수군이 바다에서 보급을 끊었고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으며 명이 지원군을 보냈습니다. 강화 교섭이 무산되자 1597년 다시 침입했고(정유재란), 1598년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군이 철수했습니다. 이 전쟁은 조선의 국토와 백성에게 큰 피해를 주었고 많은 조선인이 일본에 끌려갔습니다. 일본 도자기(아리타 등)의 발전에 조선 도공의 영향이 있었다는 점도 자주 언급됩니다.
세키가하라와 에도 막부의 시작
히데요시가 죽은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실권을 잡았고,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반대 세력을 물리쳤습니다. 1603년 쇼군에 임명되어 에도 막부를 열었습니다.
전국 시대의 시기 구분
전국 시대의 시작을 오닌의 난(1467)으로 볼지, 아니면 1493년 호소카와 마사모토의 쿠데타(메이오의 정변) 등으로 볼지에 대해 학계의 견해가 나뉜다. 끝은 1573년(무로마치 막부 멸망), 1590년(히데요시 통일), 1603년(에도 막부)으로 다양하게 잡는다. 이 글에서는 이행기로 넓게 잡는다. 전국 다이묘는 분국법(영지 내 법)을 만들어 독자적 통치를 강화했으며, 이는 중앙의 막부와 별개의 「지역 국가」적 성격이 강했다.
노부나가 평가의 재검토
노부나가는 「중세의 파괴자」로 그려지는 일이 많지만, 근래 연구는 이 이미지가 후대의 군기물·소설과 근대 사관의 영향이라고 비판한다. 『신초코키』는 가신 오타 규이치가 기록한 비교적 신뢰도 높은 사료로 쓰이지만 주군을 높이는 경향이 있다. 나가시노 전투에서 3천 정의 조총을 세 줄로 교대 사격했다는 설명은 사료(『신초코키』)에 근거가 약하다는 비판이 있고, 조총의 수와 사격 방식에 관해서는 이견이 있다. 그는 기독교 선교사에게 호의적이었지만, 이는 종교적 신념보다 정치·무역 이익과 관련되었다는 해석이 많다. 프로이스의 『일본사』는 이 시기 선교사의 시각이 담긴 사료이다.
히데요시 정권과 검지·도수령
태합검지(1582년경부터)와 도수령(1588)은 병농분리를 촉진해 근세 신분제의 기초를 놓았다. 다만 병농분리가 히데요시 정권 단계에서 완성된 것은 아니며, 에도 시대에 걸쳐 점차 굳어졌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이 정책은 전국을 단일한 지배 체제로 묶는 데 기여했다.
임진왜란·정유재란의 성격과 명칭
한국에서는 임진왜란·정유재란, 일본에서는 분로쿠·게이초의 역으로 부르고, 중국에서는 만력 조선 전쟁으로 부르는 등 명칭이 다르다. 히데요시의 목적에 관해서는 명 정복을 통한 대륙 지배 구상, 통일 후 다이묘의 불만을 밖으로 돌리려는 의도 등 여러 해석이 있다. 조선은 초기에 크게 밀렸으나 이순신의 해전 승리(한산도 대첩 1592, 명량 1597)와 의병, 명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바뀌었다. 유성룡의 『징비록』과 이순신의 『난중일기』는 조선 측의 대표 사료이며, 선조실록도 함께 보아야 한다. 전쟁으로 인한 인구 손실, 농업 황폐, 포로 송환 문제, 조일 국교 단절은 전후 오랫동안 남은 과제였다. 일본 내에서는 전쟁으로 히데요시 정권의 약화를 부른 점이 이후 도쿠가와 정권 성립의 배경이 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세키가하라 전투와 정권 교체
1600년 세키가하라는 이시다 미쓰나리 등 서군과 이에야스 등 동군이 맞선 전투로, 이에야스가 승리해 히데요리 정권의 지위를 무력화시켰다. 이에야스는 1603년 쇼군에 임명되었고, 1615년 오사카 전투로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시켰다. 이 과정은 천황·조정과의 관계, 다이묘 통제 체제(무가제법도 등)를 정비하는 것과 함께 진행되었다.
Sources · 참고 자료
- 오타 규이치 『신초코키(信長公記)』
-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
- 『조선왕조실록』(선조실록)
- 유성룡 『징비록』
- 이순신 『난중일기』
- 히데요시의 「도수령」(158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