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무 천황
임신의 난으로 즉위해 율령 국가의 기틀을 놓은 천황
AI가 작성한 글
덴무 천황(天武天皇)은 약 1,300년 전 일본의 임금입니다. 왕위를 두고 조카와 벌인 큰 싸움, 임신의 난에서 이겨 임금이 되었습니다.
덴무 천황은 임금의 힘을 크게 키우고, 나라를 다스리는 법과 관리 제도를 새로 정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천황」이라는 말과 「일본」이라는 나라 이름이 이 무렵부터 쓰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또 나라의 역사를 책으로 정리하라고 명령했는데, 이 일이 훗날 『고사기』와 『일본서기』로 이어졌습니다. 이 두 책은 지금도 일본 고대사를 알려 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덴무 천황은 본래 오아마 황자로, 덴지 천황의 동생입니다. 덴지 천황은 아들 오토모 황자에게 자리를 물려주려 했고, 오아마는 요시노로 물러나 있다가 덴지가 죽은 뒤 672년에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이것이 임신의 난입니다. 그는 미노·오와리 등 동국의 호족들을 모아 오미 조정의 군대를 물리쳤고, 이듬해인 673년 아스카 기요미하라궁에서 즉위했습니다.
즉위한 뒤 덴무는 황후 우노노사라라(뒷날 지토 천황)와 함께 황족을 중심으로 정치를 이끌었습니다. 큰 호족의 힘을 누르는 일도 했는데, 684년에는 귀족의 서열을 다시 정하는 「야쿠사노 카바네」를 만들었고, 관리 등급도 새로 정했습니다. 683년에는 「구리 돈을 쓰라」고 명해, 일본 최초의 주조 화폐로 알려진 후혼센이 만들어졌습니다. 이세 신궁을 조정 제사의 중요한 곳으로 삼아 제도를 정비한 것도 이 시기로 봅니다.
681년에는 율령 편찬과 나라의 역사 기록 정리를 명령했습니다. 율령은 그가 죽은 뒤 아스카 기요미하라령(689)과 다이호 율령(701)으로 이어졌습니다. 역사 편찬은 『고사기』(712)와 『일본서기』(720)로 결실을 맺었습니다. 덴무는 686년에 죽었고, 아내 지토가 뒤를 이어 정치를 이끌었습니다.
그의 정치는 황후 지토와의 협력이 컸습니다. 지토는 덴무가 죽은 뒤 689년 아스카 기요미하라령을 시행하고 694년 도읍을 후지와라쿄로 옮겼습니다. 후지와라쿄는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도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덴무 천황은 임신의 난에서 오미 조정을 꺾고 즉위했기 때문에 전례 없이 강한 권력을 쥐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그는 대신을 두지 않고 황후와 황자들을 중심으로 정치를 펼쳐 「황친정치(皇親政治)」라 불린다. 「천황」 칭호와 「일본」 국호가 이 무렵 정착했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1998년 아스카 이케 유적에서 「천황」이라 적힌 목간이 나온 것이 덴무 시기 사용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자주 인용되지만, 이 칭호의 성립을 스이코 시기까지 올려 보는 설도 있어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681년 역사 편찬 명령은 왕권의 정통성을 신화와 역사로 뒷받침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고 평가된다. 『일본서기』 덴무기가 그의 즉위 과정을 자세히 서술한 것도 덴무계 왕통이 이어진 뒤 정리된 기록이라는 점을 고려해 읽어야 한다. 실제로 임신의 난을 「정당한 왕위 계승」으로 그리는 서술 구조가 뚜렷하다는 연구가 있다.
국제 정세도 배경이었다. 663년 백촌강 전투 패배 뒤 당의 압박을 받은 왜는 덴무 시기에 신라와 사절을 활발히 주고받았다. 신라는 당과 대립하던 때라 왜와의 관계를 중시했고, 이 교류에서 신라의 제도와 문물이 율령 정비에 영향을 주었다는 견해가 있다. 다만 어느 제도가 어디서 왔는지는 자료가 부족해 확정하기 어렵다. 덴무와 지토는 나라현 아스카의 노구치노오하카(野口王墓) 고분(덴무·지토 합장릉)에 함께 묻힌 것으로 전한다.
덴무 시기는 「고대 국가의 출발점」으로 자주 평가되지만, 그의 제도 개혁 가운데 어디까지가 덴무 대의 것이고 어디까지가 지토·몬무 대의 것인지는 구분하기 어렵다. 관위 제도의 세부와 율령 조문은 이후 시기에 시행되었기 때문이다. 또 『만요슈』에는 「대왕은 신이시므로」라는 표현으로 덴무·지토 시기의 천황을 노래한 작품이 있어, 당시 왕권이 신성한 성격을 띠었음을 보여 주는 자료로 인용된다.
Sources · 참고 자료
- 『일본서기』 덴무기
- 『속일본기』
- 『고사기』 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