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스기 신사쿠
기헤이타이를 만들어 조슈를 움직인 젊은 지사
AI가 작성한 글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는 에도 시대 끝 무렵 조슈(지금의 야마구치현)에서 활약한 젊은 무사입니다. 요시다 쇼인의 제자로, 쇼카손주쿠에서 배웠습니다.
신사쿠는 1862년에 배를 타고 청나라 상하이에 가서, 서양 나라에 눌려 있는 청나라의 모습을 직접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돌아온 뒤에는 무사뿐 아니라 농민과 상인도 참여할 수 있는 군대 기헤이타이를 만들었습니다. 이 군대는 막부와 싸우는 조슈의 힘이 되었습니다. 신사쿠는 폐병으로 스물일곱 살(만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쇼카손주쿠의 제자
신사쿠는 1839년 조슈 번의 상급 무사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쇼카손주쿠에서 요시다 쇼인에게 배웠고, 쇼인이 처형되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1862년 막부가 상하이로 보낸 배에 올라 청나라의 모습을 살폈습니다. 아편 전쟁 이후 서양 열강에 시달리는 청의 모습을 보고 일본도 같은 운명에 처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시모노세키 전쟁과 기헤이타이
1863년 조슈 번은 시모노세키 해협을 지나가는 외국 배를 포격했고, 이듬해 영국·프랑스·네덜란드·미국 4개국 연합 함대의 보복 공격을 받았습니다. 이때 신사쿠는 번을 대표해 강화 교섭에 나섰습니다. 1863년에는 신분에 관계없이 병사를 모아 서양식으로 훈련시킨 군대 「기헤이타이」를 만들었습니다.
조슈를 구한 거병
1864년 금문의 변으로 조슈 번이 조정의 적이 되고 막부의 정벌을 받게 되자 번 안에서는 막부에 굴복하자는 세력이 힘을 얻었습니다. 그해 말 신사쿠는 소수의 병력으로 거병해 번의 정권을 다시 장악했습니다. 1866년 2차 조슈 정벌에서는 막부군을 물리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짧은 생애
신사쿠는 1867년 4월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막부가 무너지는 것을 보지 못한 채였습니다. 그가 남긴 「재미없는 세상을 재미있게」라는 시구가 유명합니다.
신사쿠는 시와 노래를 즐겨 스스로 호를 「동행(東行)」이라 짓고 시문을 많이 남겼습니다. 그의 시문 일부가 후대에 전집으로 정리되었습니다.
기헤이타이의 의미
기헤이타이는 무사 계급이 아닌 사람도 병사로 받아들인 점이 특징으로, 신분제 사회에서 새로운 군대 조직의 시도로 평가된다. 그러나 기헤이타이가 완전히 신분을 무시한 조직이었는지, 실제로 농민·상인 출신이 어느 정도 비율이었는지는 연구자에 따라 견해가 다르다. 기헤이타이는 이후 조슈 번의 군사력의 중심이 되었고, 메이지 시대 일본군의 형성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견해가 있다.
상하이 견문과 위기의식
신사쿠의 상하이 방문은 그의 세계관에 큰 영향을 주었다. 청이 서양 세력에게 굴복하는 모습을 본 그는 일본도 같은 길을 걸을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갖게 되었고, 이는 양이 사상과 무장 봉기 사이에서 그의 행동을 낳았다고 설명된다. 다만 이 견문이 그의 행동에 얼마나 결정적이었는지에 대한 평가는 사료가 서간과 시문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신중해야 한다.
행동가로서의 평가와 시대 배경
신사쿠의 거병은 조슈 번을 극적으로 바꾸었지만, 그의 행동은 전략적 계산과 감정적 충동이 뒤섞였다는 평가도 있다. 그의 사망 이듬해 메이지 유신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를 「유신을 준비한 사람」으로 강조하는 것은 결과를 알고 나서의 평가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같은 시기 조선은 흥선대원군 집권기로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를 겪었다. 조슈의 거병이 있던 시기 동아시아의 정세는 비슷한 서양의 압력 속에서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기헤이타이는 이후 조슈 번의 여러 부대로 재편되었고, 신분 문제가 다시 나타나기도 했다. 또 신사쿠가 번 안에서 거병했을 때 곧바로 다수의 지지를 얻은 것은 아니며, 초기에는 수십에서 백 명 안팎의 소규모였다는 점이 자주 강조된다. 이는 결과만으로 그의 결단을 평가하는 것을 경계하게 한다.
그의 시문에 나타나는 감정은 행동가의 이미지와 함께 예민한 문학적 감수성을 보여 준다.
Sources · 참고 자료
- 다카스기 신사쿠의 서간과 시문
- 『동행선생유문(東行先生遺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