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모토 료마
삿초 동맹을 이끌어 메이지 유신의 길을 연 낭인
AI가 작성한 글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는 에도 시대가 끝나 갈 무렵 활약한 사람입니다. 도사(지금의 고치현)의 무사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때 일본은 「막부를 유지하자」는 쪽과 「새로운 나라를 만들자」는 쪽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료마는 서로 사이가 나빴던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이 손을 잡도록 도왔습니다(삿초 동맹). 이 동맹이 막부를 무너뜨리는 힘이 되었습니다.
료마는 1867년에 교토에서 누군가에게 습격당해 31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메이지 시대는 시작되지도 못한 때였습니다.
도사의 하급 무사
료마는 1836년 도사 번의 향사(하급 무사)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집안은 원래 재산이 넉넉한 상인 출신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열아홉 살 무렵 에도로 검술을 배우러 갔는데 그 무렵 페리의 함대가 일본에 왔습니다. 이 사건을 목격하고 서양의 힘에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탈번과 가쓰 가이슈
1862년 도사 번을 나와 낭인이 되었습니다. 막부 신하 가쓰 가이슈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고, 고베의 해군 훈련소에서 배를 다루는 법을 배웠습니다. 1865년 나가사키에서 무역 상사 「가메야마샤추」를 만들어 서양 무기와 배를 거래했고, 1867년에는 도사 번의 후원으로 「해원대」로 발전했습니다.
삿초 동맹과 대정봉환
1866년 사쓰마의 사이고 다카모리와 조슈의 가쓰라 고고로 사이를 중재해 삿초 동맹을 맺도록 했습니다. 1867년에는 도사 번이 쇼군 요시노부에게 정권을 천황에게 돌려주도록 권하는 방안(대정봉환)을 준비하는 데 관여했다고 전해집니다.
암살
1867년 12월(음력 11월) 교토의 여관 오미야에서 습격을 받아 죽었습니다. 누가 죽였는지는 확실하지 않고, 막부의 경비 조직이 한 일이라는 설이 유력하지만 다른 설도 있습니다.
1866년 료마는 교토 데라다야에서 막부 관리의 습격을 받아 손가락 등에 부상을 입었지만 목숨을 건졌고, 이후 아내 오료와 함께 사쓰마에서 요양했습니다. 이 여행이 일본 최초의 신혼여행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료마 이미지의 형성
오늘날 널리 알려진 료마의 이미지는 시바 료타로의 소설 『료마가 간다』(1960년대)에 크게 힘입었다. 이 작품은 사실을 바탕으로 했으나 허구가 많이 섞였고, 대중에게 유신 영웅으로서의 료마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그러나 실제 료마의 역할을 어디까지 높이 평가할지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들의 견해가 갈린다. 삿초 동맹의 성립은 료마 개인의 중재보다 사쓰마·조슈 두 번(藩)의 정세 변화와 사이고·가쓰라의 판단이 결정적이었다는 지적이 있다.
사료의 문제: 「선중팔책」
료마가 새 정부의 구상을 담았다고 알려진 「선중팔책」은 원본이 남아 있지 않고 후대의 기록에서만 확인되어 진위와 성립 경위에 논쟁이 있다. 료마의 서간은 비교적 사료로서 신뢰도가 높지만, 서신의 내용이 실제 계획인지 의견 표명인지에 따라 해석이 다르다. 그가 쓴 편지를 바탕으로 하는 연구와 후대의 이야기를 구별하는 사료 비판이 중요하다.
암살의 진상과 동시대의 동아시아
료마 암살의 범인으로는 막부 소속 경비 조직(미마와리구미)이 실행했다는 설이 유력하지만, 신센구미설, 기슈 번설, 사쓰마 번 관여설 등이 제기되었다. 결정적 증거가 없어 논쟁이 이어진다. 한편 1866년 삿초 동맹이 맺어진 해에 조선에서는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공격한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같은 시기 동아시아 국가들이 서양의 압력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점이다.
「선중팔책」이 그리는 대정봉환, 의회 설치, 헌법 제정 등의 구상은 실제 메이지 정부의 정책과 놀랄 만큼 닮아 있어서, 오히려 후대에 재구성되었다는 의심을 받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료마 연구는 사실과 신화를 가르는 작업과 뗄 수 없다.
또한 료마가 사쓰마와 조슈를 이어 준 「중재자」라는 평가는 그가 두 번 모두 결정권자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상징적이다. 그의 역할을 정치적 결정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물자와 정보를 잇는 네트워크 형성자로 재평가하려는 시각도 있다.
Sources · 참고 자료
- 사카모토 료마의 서간
- 「선중팔책」(진위와 성립에 논쟁이 있는 사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