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히로부미
초대 총리이자 헌법 기초자, 초대 한국 통감
AI가 작성한 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일본의 첫 번째 총리가 된 정치인입니다. 일본이 헌법을 만들 때 중심에서 일했습니다. 일본 사람들에게는 나라를 근대화한 지도자로 기억됩니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에게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한국 침략을 이끈 사람으로 기억됩니다.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뒤 초대 통감이 되었습니다. 1909년 10월 중국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의 총에 맞아 숨졌습니다. 같은 사람을 두 나라가 아주 다르게 기억하는 셈입니다.
이토는 1841년 조슈 번(지금의 야마구치현)에서 가난한 농민 집안에 태어났고, 아버지가 하급 무사 이토 가문의 양자가 되면서 무사 신분을 얻었습니다. 요시다 쇼인의 학숙에서 배웠고 1863년 동료들과 영국에 몰래 유학을 다녀왔습니다. 메이지 정부에서는 1871년 이와쿠라 사절단의 부사로 구미를 돌았고, 1880년대에 유럽에서 헌법을 연구한 뒤 1889년 대일본제국 헌법의 기초를 주도했습니다. 1885년 내각제가 시작되자 초대 총리대신이 되었고 모두 네 차례 총리를 지냈습니다. 1900년에는 정당 입헌정우회를 만들었습니다.
청일전쟁 뒤 시모노세키 조약(1895) 협상에 전권으로 참여했고, 러일전쟁 뒤인 1905년 을사늑약(제2차 한일협약)을 강요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습니다. 이어 초대 통감으로 1906년부터 통감부를 이끌었고, 그의 통감 재임 중에 고종 강제 퇴위(1907)와 한국 군대 해산이 이루어졌습니다. 1909년 통감직에서 물러났고, 그해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에게 저격당해 숨졌습니다. 일본 정부는 이 사건 전인 1909년 7월에 이미 병합 방침을 정한 상태였으며, 이 사건이 병합에 준 영향에 대해서는 해석이 나뉩니다.
이토는 1898년 이후 정당 정치에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를 두고 번벌 동료들과 갈등했고, 1900년 입헌정우회를 창당해 총재가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통감 재임 중의 조치들이 일본의 지배 체제를 만들어 가는 과정으로 기억됩니다.
이토는 대일본제국 헌법의 기초를 주도한 인물로, 프로이센 헌법을 참고하면서도 천황을 중심에 둔 국가 체제 안에 의회와 내각을 두는 구조를 짰다. 헌법은 천황에게 통치권을 주되 제국의회와 내각을 통해 행사하도록 했고, 이토는 이것이 일본의 국체에 맞는 입헌제라고 보았다. 이 구조는 이후 군의 통수권 독립으로 이어지는 틈을 남겼기 때문에, 그의 설계는 근대 일본 정치의 강점과 한계를 함께 낳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과 관련한 이토 평가에서 자주 다뤄지는 것은 병합의 시기와 방식이다. 이토는 곧바로 병합하기보다 통감 통치를 통해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어 일본의 영향 아래 두는 쪽을 선호했다는 견해가 있고, 병합을 서두른 군부·강경파와 구분해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통감으로 있는 동안 정미 7조약과 군대 해산(1907)이 이루어졌고, 사법권 위탁(기유각서, 1909년 7월)도 그의 재임 중에 준비되었다는 점에서 침략의 주도자였다는 평가와 겹친다. 「온건한 이토」라는 서술이 병합의 책임을 덜어 주는 방향으로 쓰이는 데 대해서는 비판이 있다.
안중근은 재판에서 이토의 죄로 15가지를 들었고, 옥중에서 『동양평화론』을 구상했으나 완성하지 못했다. 일본에서는 이토를 근대 국가 건설의 공로자로 기억하는 시각이 있고 한국에서는 침략의 상징으로 보는 시각이 강하다. 이 대비는 같은 사건이 두 사회에서 어떻게 다르게 기억되는지를 보여 준다. 그래서 일본 측 전기와 한국 측 자료를 함께 대조해 읽어야 한다.
이토의 죽음을 다룬 사료도 서로 다르다. 일본 측 기록은 저격 사건을 개인의 테러로 서술하는 경향이 있고, 한국 측은 의병 활동과 독립운동의 연장에서 의거로 평가한다. 안중근의 재판은 일본 법에 따라 뤼순에서 진행되었고 1910년 3월 사형이 집행되었는데, 이 재판의 관할권과 절차를 둘러싼 논쟁도 오래 이어졌다.
Sources · 참고 자료
- 『대일본제국 헌법』(1889년)
- 「시모노세키 조약」(1895년)
- 「제2차 한일협약(을사조약)」(1905년)
- 안중근 『동양평화론』
- 춘무공 추송회 『이토 히로부미 전』(194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