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자와 유키치
서양 학문을 소개한 메이지의 계몽 사상가
AI가 작성한 글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는 일본 사람들에게 서양의 학문과 생활을 소개한 학자입니다. 책 『서양사정』과 『학문의 권유』를 써서 많은 사람이 새로운 지식을 알 수 있게 했습니다.
『학문의 권유』에는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아래 사람도 만들지 않았다」라는 유명한 문장이 있습니다. 신분이 아니라 공부로 스스로 서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는 게이오 의숙이라는 학교를 세웠고, 지금의 게이오 대학교가 되었습니다. 일본의 1만 엔 지폐에도 오랫동안 그려져 있었습니다. 다만 한국과 중국을 바라본 생각 때문에 한국에서는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후쿠자와는 1835년 오사카에 있던 나카쓰 번의 창고 저택에서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신분 때문에 재능을 펼치기 어렵다는 생각을 일찍부터 했고, 나가사키와 오사카에서 네덜란드어를 배웠습니다. 1858년 에도에서 연 학숙이 뒤에 게이오 의숙(1868년 이름 확정)이 되었습니다. 개항장 요코하마에서 네덜란드어가 통하지 않는 것을 보고 영어로 방향을 바꾸었다는 일화가 유명합니다.
1860년에는 간린마루에 수행원으로 타고 미국에, 1862년에는 막부 사절단의 일원으로 유럽에 다녀왔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서양사정』(1866)을 써서 서양의 제도와 풍속을 알렸습니다. 『학문의 권유』(1872~1876)는 17편으로 나뉘어 나왔고 실용적인 학문과 개인의 독립을 강조했습니다. 1882년에는 신문 『시사신보』를 창간해 논설을 이어 갔습니다.
조선과의 관계에서는 개화파와 교류했습니다. 유길준 같은 조선인 유학생을 받아들였고 김옥균 등 개화파를 후원했습니다. 그러나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한 뒤 1885년 3월 『시사신보』에 실린 사설 「탈아론」에서, 일본이 아시아의 낡은 이웃(청·조선)과 같은 취급을 받지 않도록 서양 문명국과 행동을 같이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글은 이후 한국과 중국을 보는 시각과 관련해 논쟁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후쿠자와는 메이지 정부의 관직에는 나가지 않고 민간에서 활동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게이오 의숙은 1868년 이름을 정한 뒤 사립 학교로 자리를 잡았고, 그는 신문과 저술을 통해 여론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여성과 가족, 의식주와 예절 같은 생활 문제에 관한 논설도 남겼습니다.
후쿠자와는 「문명개화」를 이끈 계몽가로 평가되지만, 그의 사상은 시기에 따라 변화했고 평가가 엇갈린다. 초기의 『학문의 권유』는 개인의 독립과 평등을 강조했으나 1880년대 이후에는 국제 정세 속에서 국권과 국가 독립을 우선하는 논조가 강해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명이다. 「한 몸이 독립해야 한 나라가 독립한다」는 취지의 표현이 개인 독립의 논리인지 국가주의로 옮겨 가는 논리인지에 대해서도 해석이 나뉜다.
「탈아론」은 1885년 3월 16일 『시사신보』에 서명 없이 실린 사설이다. 이 글을 후쿠자와가 직접 썼는지에 대해서는 오래 논쟁이 있었으나 그의 사상을 반영한 글이라는 점에서는 대체로 의견이 모인다. 쟁점은 이 글의 위상이다. 후쿠자와의 아시아관을 압축한 대표 자료로 보는 견해가 있는 반면, 갑신정변 실패 직후의 좌절과 분노를 담은 일시적 반응이었고 당시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는 견해도 있다. 이 사설은 발표 당시 크게 주목받지 못했고 1950년대 이후 재발견되어 유명해졌으며, 흔히 쓰이는 「탈아입구」라는 말은 후쿠자와 본인이 쓴 표현이 아니라는 점도 자주 지적된다.
한국에서는 그를 조선 침략 논리를 제공한 인물로 비판하는 시각이 강하고, 일본에서는 근대 교육과 시민 정신의 선구자로 평가하는 시각이 강하다. 두 평가 모두 그의 저작 일부에 근거를 두고 있으므로, 개인 저서와 신문 사설을 구별하고 시기별 저작을 함께 읽어야 한다. 2024년 1만 엔권 초상이 시부사와 에이이치로 바뀐 것은 지폐 도안의 교체이며 평가의 변화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문명론의 개략』(1875)에서 그는 문명을 정신의 발달로 보고 국가의 독립을 문명의 목적으로 삼는다고 썼다. 이 저작은 그가 서양 문명을 무조건 숭배한 것이 아니라 국제 정세를 비교적 냉정하게 읽으려 했음을 보여 주는 자료로 자주 인용된다. 그러나 조선 정책과 관련해 쓴 일부 사설에 강경한 논조가 나타난다는 점 때문에, 계몽 사상가와 국권주의자라는 두 얼굴이 어떻게 이어지는가가 연구의 중심 문제로 남아 있다.
Sources · 참고 자료
- 후쿠자와 유키치 『서양사정』(1866년~)
- 후쿠자와 유키치 『학문의 권유』(1872~1876년)
- 후쿠자와 유키치 『문명론의 개략』(1875년)
- 「탈아론」(1885년 3월 『시사신보』 사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