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아미
노(能)를 예술로 완성한 배우이자 이론가
AI가 작성한 글
제아미(世阿弥)는 600년쯤 전 일본의 노(能) 배우입니다. 노는 가면을 쓰고 느린 춤과 노래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옛 연극입니다. 지금도 무대에 오릅니다.
제아미는 아버지 간아미와 함께 노 극단을 이끌었습니다. 열두 살 무렵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눈에 들어 후원을 받았고, 노를 아름답고 깊이 있는 예술로 발전시켰습니다.
또 좋은 배우가 되려면 어떻게 연습하고 무엇을 마음에 새겨야 하는지 책으로 써서 남겼습니다. 이 책들은 지금도 읽힙니다.
제아미의 노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지금도 극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쇼군의 눈에 든 소년
제아미는 아버지 간아미와 함께 노(당시에는 사루가쿠라고 불렸습니다)를 이끌었습니다. 1370년대 중반 교토 이마쿠마노 신사에서 열린 공연에서 열두 살 무렵의 제아미가 쇼군 요시미쓰의 눈에 띄었고, 이때부터 요시미쓰의 후원을 받아 무사와 귀족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문학 교양이 깊은 귀족 니조 요시모토와도 교류하며 렌가 등 교양을 쌓았습니다.
노를 완성하다
제아미는 「유현(幽玄, 깊고 그윽한 아름다움)」을 노의 이상으로 삼았고, 죽은 사람의 영혼이 나타나 사연을 털어놓는 「몽환노」의 형식을 완성했다고 평가됩니다. 「다카사고」, 「이즈쓰」 등이 그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풍자화전』(1400년 무렵부터 정리)과 『화경』(1424년) 등에 배우의 수련 방법과 무대 표현의 원리를 정리했습니다. 이 책들은 원래 가문의 비밀로 전해졌습니다.
만년의 시련
요시미쓰가 죽은 뒤 후원이 약해졌고, 쇼군 요시모치는 다른 배우를 더 아꼈습니다. 만년에는 쇼군 요시노리의 미움을 사서 공연이 제한되었고, 아들 모토마사가 갑자기 죽는 불행도 겪었습니다. 1434년 사도로 유배되었습니다. 이후 사면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정확한 최후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제아미가 이끈 극단(간제자, 관세좌)은 오늘날 노의 유파 중 하나인 간제류로 이어집니다. 제자이자 사위인 곤파루 젠치쿠 등도 노를 발전시켰고, 노는 이후 에도 막부의 공식 예능(식악)이 되었습니다.
예능의 격상
제아미는 서민 예능이던 사루가쿠를 무가와 귀족 취향의 예술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평가된다. 사루가쿠의 기원에는 나라 시대에 대륙에서 전해진 산악 등의 예능이 있었다는 설이 있다. 제아미 이전의 노는 흉내 내기 중심의 연극적 성격이 강했으나, 제아미는 노래와 춤의 「우아함」을 강조했고 귀족의 문학 소양(『겐지 이야기』 『이세 이야기』 등)을 작품에 끌어들였다. 이 점에서 노는 무로마치 시대 문화의 성격을 잘 보여 준다.
『풍자화전』의 이론
『풍자화전』은 「꽃(花)」이라는 개념으로 배우의 성장 단계와 무대 원리를 논한 이론서로, 일본 예술론의 고전이다. 「꽃」은 관객을 사로잡는 매력이며, 나이에 따라 배우의 「꽃」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배우가 어떻게 「꽃」을 유지할 것인지를 논한다. 「비밀로 하면 꽃이 된다」는 구절처럼 「감춤의 미학」도 반복해서 강조한다. 이러한 이론은 후대 일본 예술론과 다도 등에 영향을 주었다는 평가가 있다.
사료의 한계
작품 다수는 「꿈 같은 이야기」의 구조를 가져, 선종과 불교적 무상관의 영향이 크다고 해석된다. 다만 제아미의 정확한 생몰년은 확정되지 않았으며(1363년경~1443년경으로 흔히 소개됨), 사도 유배의 이유도 명확하지 않아 연구자에 따라 견해가 다르다. 또 지금 남아 있는 노의 작품 중 어느 것이 제아미가 직접 지었는지는 학자마다 견해가 갈린다. 한국의 탈춤이나 가면극과 비교하면, 서민의 놀이에서 출발한 가면 예능이 어떤 후원 구조 아래에서 발전했는지에 따라 다른 길을 걸었다는 점이 흥미로운 비교점이다.
제아미의 이론서는 오랫동안 가문 안에서만 전해지다가 20세기 초에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그래서 그를 근대 이후에 재발견된 이론가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이 점은 옛 예술가의 사상이 어떤 경로로 지금의 평가를 얻게 되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Sources · 참고 자료
- 제아미 『풍자화전(風姿花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