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쿠라 도모미
왕정복고를 이끌고 서양 시찰 사절단을 이끈 공가 출신 정치가
AI가 작성한 글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는 교토의 궁중 귀족(공가) 출신으로, 메이지 유신 때 천황 중심의 새 정부를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한 정치가입니다. 1871년에는 정부의 대표가 되어 미국과 유럽을 돌아보는 사절단을 이끌었습니다. 이 사절단에는 오쿠보 도시미치와 기도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 등 정부 요인이 다수 참여했습니다. 서양의 제도와 산업을 직접 보고 돌아온 경험은 이후 일본이 나아갈 방향을 정하는 데 영향을 주었습니다. 옛 500엔 지폐에 초상이 쓰인 적도 있습니다.
도모미는 1825년 교토에서 태어나 이와쿠라 가문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고메이 천황을 가까이서 모시며 정치에 관여했고, 막부와 조정이 손을 잡자는 공무합체론을 지지해 1862년 천황의 여동생 가즈노미야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에게 시집가는 일을 도왔습니다. 이 일로 반막부 세력에게 비판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나 교토 근교에서 몇 해를 지냈습니다.
1867년 정치에 복귀한 그는 오쿠보 도시미치, 사이고 다카모리와 손을 잡고 12월의 왕정복고 쿠데타를 이끌었습니다. 신정부에서 요직을 맡았고, 1871년에는 우대신의 자리에서 특명전권대사가 되어 사절단(이와쿠라 사절단)을 이끌고 미국과 유럽 12개국을 돌아보았습니다. 사절단의 원래 목적은 막부가 맺은 불평등 조약을 고치는 교섭을 준비하는 것이었으나, 교섭은 성과 없이 끝났고 이후 서양 제도의 시찰과 학습에 중점이 놓였습니다. 이 여정은 구메 구니타케가 『미구회람실기』로 기록했습니다.
1873년 귀국한 그는 사이고를 조선에 사절로 보내 무력을 배경으로 개국을 압박하자는 정한론에 반대하는 쪽에 섰고, 이 논쟁 끝에 사이고 등이 정부를 떠났습니다. 1881년 정치 위기 뒤에는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프로이센(독일)식 헌법을 모델로 삼는 방향을 잡는 데 역할을 했습니다. 도모미는 1883년 세상을 떠났고, 대일본제국 헌법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인 1889년에 공포되었습니다.
도모미는 궁중 귀족 가운데 정치 감각이 뛰어난 인물로 평가되며, 공가 신분으로 사쓰마·조슈 세력과 손을 잡은 점이 특징입니다.
도모미는 신분 질서가 무너지는 시대에 공가 출신이면서 무사 출신 정치가들과 협력해 정권 이행을 이끈 인물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조정과 유신 세력을 잇는 매개자로 평가된다. 그러나 초기에는 공무합체론을 지지했다가 왕정복고로 노선을 바꾼 것은 정세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한 것으로 설명되기도 하고, 원칙 없는 변신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그의 노선이 상황에 따라 달라졌다는 점은 사료에서 확인된다.
사절단은 근대 일본의 형성을 이해할 때 가장 자주 언급되는 사건 가운데 하나다. 사절단의 성과를 조약 개정 실패의 관점에서만 볼지, 제도 도입의 관점에서 볼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 조약 개정은 실패했지만, 참가자들이 국력의 격차를 눈으로 확인하고 돌아와 내정 개혁을 우선해야 한다는 인식을 공유했다는 점이 이후 정한론 논쟁의 배경이 되었다는 해석이 널리 받아들여진다. 사절단의 기록인 『미구회람실기』는 서양 사회에 대한 관찰과 함께 일본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저자의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사료로서의 성격을 함께 봐야 한다.
헌법 제정과의 관계에서는 이와쿠라의 「대강령」이 자주 인용된다. 1881년 그는 군주 권한을 크게 인정하는 헌법 노선을 정부의 방침으로 삼는 데 힘을 썼고, 이것이 이토 히로부미가 프로이센식 헌법을 연구하는 흐름으로 이어졌다고 설명된다. 다만 이런 서술은 헌법 제정에서 이토의 역할을 강조하는 다른 서술과 강조점이 다르며, 각각의 기여를 어떻게 나눌지는 연구자에 따라 다르다. 이와쿠라 도모미의 삶은 메이지 국가가 조정과 무사 출신 지도자들의 협력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을 보여 주는 사례로 읽을 수 있다.
1871년 출발한 사절단에 일본 최초의 여자 유학생 다섯 명이 동행했다는 점(쓰다 우메코 등)도 사절단의 부수적 성과로 자주 소개된다. 이는 사절단이 정부 요인의 시찰에 그치지 않고 교육 분야의 출발점이 되기도 했음을 보여 준다.
Sources · 참고 자료
- 구메 구니타케 『특명전권대사 미구회람실기』(1878년)
- 『이와쿠라 공 실기(岩倉公実記)』(1906년)
- 『오쿠보 도시미치 문서(大久保利通文書)』(일본사적협회, 1927~192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