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카가 다카우지
무로마치 막부를 연 초대 쇼군
AI가 작성한 글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는 무로마치 막부를 연 첫 번째 쇼군입니다. 원래는 가마쿠라 막부를 섬기던 힘센 무사였습니다.
1333년에 다카우지는 가마쿠라 막부의 명령을 받고 고다이고 천황을 치러 나섰다가 마음을 바꿔서 오히려 막부의 교토 기관을 공격했습니다. 이 일로 가마쿠라 막부가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새로 시작된 천황의 정치에 무사들이 불만을 품자 다카우지는 천황과도 싸우게 됐습니다. 그는 교토에 다른 천황을 세웠고, 그 바람에 천황이 두 명 있는 남북조 시대가 시작됐습니다. 1338년에 다카우지는 쇼군이 되어 무로마치 막부를 열었습니다.
가마쿠라 막부의 무사에서 반란자로
아시카가 가문은 미나모토 씨의 한 갈래로, 가마쿠라 막부에서 호조 씨 다음가는 명문으로 대우받았습니다. 다카우지는 1305년에 태어나 1333년 막부의 명령으로 군대를 이끌고 교토로 향했습니다. 고다이고 천황이 오키섬을 탈출해 막부 토벌을 부르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카우지는 도중에 뜻을 바꿔 교토의 막부 기관인 로쿠하라 탐제를 공격했고, 같은 무렵 닛타 요시사다가 가마쿠라를 함락해 막부는 멸망했습니다. 이때 다카우지는 고다이고 천황의 이름 한 글자를 받아 이름을 「다카우지(尊氏)」로 고쳤습니다.
겐무 신정과의 결별
고다이고 천황의 새 정치(겐무 신정)는 공을 세운 무사들에게 충분히 보답하지 못해 불만을 샀습니다. 1335년 호조 씨 잔당이 일으킨 나카센다이의 난을 진압하러 동쪽으로 내려간 다카우지는 천황의 허락 없이 부하들에게 상을 내렸고, 이 일을 계기로 천황과 갈라섰습니다. 1336년에는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천황 편의 구스노키 마사시게를 물리치고 교토에 들어가 고묘 천황을 세웠습니다. 같은 해 11월에는 막부의 기본 방침인 「겐무 식목」을 발표했습니다. 고다이고 천황이 요시노로 도망쳐 따로 조정을 열면서 남북조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막부 안의 갈등과 죽음
1338년 다카우지는 세이이타이쇼군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치를 맡은 동생 다다요시와 가신 고노 모로나오 사이의 다툼이 커져 1350년부터 「간노의 소란」이라는 내전이 이어졌고, 다카우지는 결국 동생과도 싸웠습니다. 1358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고다이고 천황의 명복을 빌기 위해 교토에 덴류지를 세웠고, 그 건립 자금을 마련하려고 원나라에 무역선(덴류지선)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평가의 진폭
다카우지는 「역적」과 「무사의 이익을 대변한 정치가」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아 왔다. 근대 일본에서는 남조를 정통으로 삼는 사관이 널리 퍼졌다. 1911년 남북조 정윤 문제가 국회에서 논란이 된 끝에 남조가 정통으로 정리되었고, 다카우지는 대표적인 역신으로 취급되었다. 1934년에는 다카우지를 높이 평가한 예전 글이 문제가 되어 상공대신이 사임하는 일도 있었다. 전후에는 조정·귀족 중심의 낡은 질서에 맞서 무사 사회의 요구를 정치에 반영하려 한 인물로 다시 평가되었다.
사료의 성격
주요 사료는 성격이 서로 다르다. 『태평기』는 남조에 동정적이고 다카우지를 비판하는 시선이 강한 군기 이야기다. 『매송론』은 아시카가 측의 정통성을 뒷받침하는 입장에서 쓰였다. 그래서 다카우지의 「배신」을 해석할 때 어느 사료를 중시하느냐에 따라 결론이 갈린다. 교과서에 자주 실리던 「다카우지 상」으로 알려진 기마 무사 그림이 다카우지가 아니라 다른 인물이라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어, 얼굴 이미지 자체도 재검토의 대상이다.
막부 성립 시점과 구조
무로마치 막부가 언제 성립했는지도 논쟁이다. 1336년 겐무 식목을 발표한 때로 볼 수도 있고, 1338년 쇼군에 임명된 때로 볼 수도 있다. 다카우지 정권은 다카우지가 무사에 대한 군사 지휘권을, 동생 다다요시가 행정과 재판을 맡는 이원 체제로 출발했는데, 이 구조가 간노의 소란의 배경이 되었다는 설명이 일반적이다. 남북조의 약 56년 동안 지방 무사를 붙들기 위해 수호에게 넓은 권한이 주어졌고, 이것이 후대 수호 다이묘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한편 14세기 중반부터 왜구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늘어, 고려와 조선이 일본에 단속을 요구하는 배경이 되었다.
또 다카우지가 고다이고 천황의 명복을 빌기 위해 덴류지를 세운 것은 정치적 적대와 존경이 함께 있었던 그의 태도를 보여 주는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이러한 양면성 때문에 그의 행동을 한 가지 잣대로 평가하기 어렵다.
Sources · 참고 자료
- 『태평기』
- 『매송론(梅松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