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와라노 미치나가
섭관 정치의 절정을 이끈 귀족
AI가 작성한 글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는 약 1,000년 전 일본 귀족 가운데 가장 힘이 셌던 사람입니다. 딸 세 명을 차례로 임금의 아내로 만들어서, 임금의 외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때 일본에서는 임금의 외할아버지가 나랏일을 이끄는 일이 많았습니다. 미치나가는 그 힘을 가장 크게 누렸습니다. 어느 날 잔치에서 「이 세상은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 보름달처럼 모자란 것이 없으니」라는 노래를 읊었다고 합니다.
미치나가는 자신의 일기도 남겼는데, 이 일기 덕분에 그 시대 귀족의 생활을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미치나가는 966년 후지와라노 가네이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다섯째 아들이라 처음에는 권력자가 될 가능성이 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995년 병과 유행병으로 위의 형들이 잇따라 죽자 조정의 중심에 서게 되었고, 조카 고레치카와의 권력 다툼에서도 이겼습니다(996).
미치나가는 딸을 천황의 아내로 들이는 방식으로 권력을 다졌습니다. 1000년 딸 쇼시를 이치조 천황의 중궁으로 세웠고, 쇼시가 낳은 아들이 뒷날 고이치조·고스자쿠 천황이 되었습니다. 1016년 외손자 고이치조가 즉위하자 그를 대신해 정치를 하는 섭정이 되었지만 이듬해 아들 요리미치에게 넘겼습니다. 1018년에는 세 딸이 황후·중궁 자리를 모두 차지하는 「한 집안에서 세 황후」를 이루었고, 그날 잔치에서 「이 세상을」로 시작하는 노래를 읊었다고 합니다.
그의 시대는 화려한 궁중 문화가 꽃핀 때이기도 합니다. 쇼시의 궁에는 무라사키 시키부와 이즈미 시키부 등 여성 문인이 모였습니다. 미치나가는 1019년 출가했고, 호조지 같은 큰 절을 지어 정토 신앙에 기울었습니다. 1028년 죽었습니다.
사네스케의 일기 『소우키』 등에는 그가 물을 많이 마시고 몸이 쇠약해졌다는 기록이 있어 당뇨병이었다는 추정이 있습니다. 노년에는 눈이 잘 보이지 않았다고도 합니다. 그의 주변에는 미나모토노 요리미쓰 같은 무사들도 가신으로 봉사하며 권력을 뒷받침했습니다. 그는 궁중 의례를 세세히 기록해 후대 귀족의 규범이 되도록 했습니다.
미치나가는 형 미치타카와 미치카네가 잇따라 죽은 995년 뒤 조정의 실권을 잡았고, 996년 조카 후지와라노 고레치카가 좌천된 조토쿠의 변으로 경쟁자를 물리쳤다. 그가 실제로 섭정이었던 기간은 1016~1017년으로 짧지만, 「내람(內覧)」이라는 자리로 천황에게 올라가는 문서를 먼저 볼 수 있어 사실상 정치를 좌우했다. 딸 셋을 각각 이치조·산조·고이치조 천황의 후궁으로 넣고 외손자들을 천황으로 세우는 방식은 「섭관 정치」의 전형으로 설명된다.
1018년 잔치에서 읊었다는 「이 세상을」 노래는 후지와라노 사네스케의 일기 『소우키』에 실려 있다. 같은 기록에는 사네스케가 이 노래에 화답하는 대신 모두 함께 이 노래를 읊자고 제안했다는 대목이 있어, 이 노래가 미치나가의 권력 의식을 보여 주는 자료로 자주 인용된다. 다만 잔치의 흥에서 나온 즉흥이었는지, 권력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었는지는 해석이 나뉜다. 그의 일기 『미도관백기』는 자필본이 남아 있어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섭관 정치는 천황권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천황의 권위를 전제로 외척이 권력을 행사한 구조라는 견해가 있다. 그 아래 지방에서는 국사(수령)가 세금을 걷는 체제가 굳어지고 장원이 늘었다. 미치나가 시대 말기에는 북방 해적이 쓰시마·이키·규슈 북부를 습격한 도이의 입구(1019)가 일어났다. 이때 다자이후가 이를 물리쳤고, 고려가 여진족 해적에게 붙잡혀 있던 일본인 포로 수백 명을 송환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사건은 헤이안 시대 후반 동아시아 정세를 보여 주는 예로 자주 언급된다.
미치나가 주변에 미나모토노 요리미쓰 같은 무사들이 봉사했다는 점은, 이런 무사와 귀족의 결합이 이후 무사 세력이 성장하는 발판이 되었다는 견해와 이어진다. 그의 시대가 귀족 정치의 절정이었다는 평가와 함께, 이미 다음 시대의 조짐이 자라고 있었다는 관점이다.
Sources · 참고 자료
- 『소우키』(후지와라노 사네스케의 일기)
- 『미도관백기』(미치나가 본인의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