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조몬·야요이 시대와 나라의 시작
AI가 작성한 글
새끼줄무늬 그릇을 쓰던 사람들, 조몬 시대
오래전 일본 땅에는 사냥하고 열매를 따서 먹고사는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진흙을 빚어 불에 구워 그릇을 만들었습니다. 그릇에 새끼줄 무늬를 새겨서 이 시대를 조몬(縄文) 시대라고 부릅니다. 이 시대는 1만 년이 넘게 이어졌습니다.
벼농사가 시작된 야요이 시대
그 뒤에 벼농사와 쇠로 만든 도구가 들어왔습니다. 한반도와 대륙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새로운 기술을 알려 주었다고 합니다. 이때를 야요이(弥生) 시대라고 합니다. 벼를 키우니 곡식을 모아 둘 수 있게 되었고, 마을이 커지면서 권력을 가진 지도자가 생겼습니다. 사가현의 요시노가리 유적에는 마을 둘레에 큰 도랑을 판 모습이 남아 있습니다.
여왕 히미코
중국의 옛 책에는 일본 땅에 야마타이국이라는 나라가 있었고, 히미코라는 여왕이 다스렸다고 쓰여 있습니다. 히미코는 중국의 위나라에 사신을 보냈고, 위나라 황제에게서 「왜의 왕」으로 인정받았다고 합니다.
커다란 무덤, 고분 시대
3세기 무렵부터는 강한 힘을 가진 왕과 귀족이 매우 큰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무덤 모양이 앞은 네모나고 뒤는 둥글어서 **전방후원분(열쇠구멍 모양 무덤)**이라고 부릅니다. 이 시대를 고분 시대라고 합니다. 이 무렵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쇠 다루는 기술, 옷감 짜는 기술, 한자를 전해 주었습니다.
조몬 시대: 수렵·채집 사회
조몬 시대는 1만 년이 넘게 이어진 긴 시기로, 사람들은 사냥·고기잡이·열매 채집으로 생활하면서도 일정한 곳에 정착했습니다. 새끼줄 무늬가 있는 토기가 대표적 유물입니다. 아오모리현 산나이마루야마 유적 등 「홋카이도·북동북 조몬 유적군」은 2021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올랐습니다.
야요이 시대: 벼농사와 금속기
야요이 시대에는 규슈 북부를 시작으로 벼농사가 퍼졌고 청동기·철기가 쓰였습니다. 시작 시기에는 학계에 논쟁이 있으며, 기원전 10세기 무렵부터 기원후 3세기 중반까지로 보는 견해가 널리 소개됩니다. 벼농사와 금속기 문화가 한반도를 거쳐 전해졌다는 견해가 유력합니다. 수확한 곡식과 땅을 둘러싼 갈등이 커지면서 마을 둘레에 도랑을 두른 환호 집락(요시노가리 유적 등)과 소국들이 나타났습니다.
야마타이국과 히미코
『위지』 왜인전은 30여 개의 소국이 있던 왜에서 여왕 히미코가 야마타이국을 중심으로 나라를 이끌었다고 전합니다. 히미코는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친위왜왕」이라는 칭호와 금인, 청동 거울 100장 등을 받았다고 합니다. 야마타이국의 위치는 기나이(오늘날 나라 일대)설과 규슈설로 나뉘어 지금도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고분 시대와 야마토 정권
3세기 중반 무렵부터 6세기 말 무렵까지 전방후원분이 세워졌습니다. 오사카 사카이시의 다이센 고분(닌토쿠 천황릉으로 전해짐)이 대표적이며, 모즈·후루이치 고분군은 2019년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이 무렵 기나이 지역의 야마토 정권이 각지 호족을 묶어 나갔습니다.
한반도와의 교류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은 철기 제작, 직조, 토목, 한자와 유교 같은 문화를 전했습니다. 백제와 특히 활발히 교류했습니다.
야마타이국을 둘러싼 논쟁
『위지』 왜인전은 3세기 중반 일본 열도 사정에 관한 거의 유일한 동시대 기록이다. 기록에 따르면 히미코는 위 경초 연간에 사신을 보내 「친위왜왕」의 칭호를 받았다. 『위지』 현존 본문은 경초 2년(238)으로 적혀 있으나, 『일본서기』가 인용한 기록 등을 근거로 3년(239)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야마타이국의 위치는 기나이설과 규슈설이 맞서는데, 기나이설은 이후 야마토 정권으로 이어지는 연속성을 강조하고, 규슈설은 기록의 방위와 거리 계산을 중시한다. 나라현 하시하카 고분 등 고고학 자료를 근거로 한 논의도 계속되지만 결정적 증거는 없다.
5세기 야마토 정권과 동아시아 국제 질서
『송서』 왜국전에는 5세기에 찬(讚)·진(珍)·제(濟)·흥(興)·무(武)의 다섯 왜왕이 남조 송에 조공하고 관작을 요청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왜의 5왕」은 일본 학계에서 『일본서기』 등의 천황과 대응시키는 연구가 이루어져 왔으며, 특히 왜왕 무는 유랴쿠 천황으로 비정하는 설이 유력하다. 왜왕이 한반도 남부 여러 나라에 대한 군사적 지위를 송에 요청한 점은 당시 왜가 한반도 정세에 깊이 관여하려 했음을 보여 준다.
광개토대왕릉비문과 칠지도
414년에 세워진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왜가 바다를 건너 백제·신라를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른바 신묘년 기사의 해석은 한국·일본 학계에서 크게 갈린다. 이소노카미 신궁의 칠지도 명문도 해석이 나뉜다. 한국 학계는 백제 왕이 왜왕에게 내린 것으로 읽는 견해가 우세하고, 일본 학계에는 헌상으로 읽는 견해와 대등한 관계로 읽는 견해가 있다. 두 사료 모두 판독과 문맥 해석에 이견이 크므로, 이 자료로 당시 한일 관계의 위계를 단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도래인과 문화 전파
『고사기』는 백제에서 왕인이 『논어』와 『천자문』을 전했다고 기록하나(『일본서기』는 왕인이 태자를 가르쳤다고 전한다), 이 기록의 연대와 사실성에는 논의가 있다. 그렇지만 고고학적으로는 5세기를 전후해 철 생산, 말 사육, 스에키 토기 제작, 직조 같은 기술이 한반도에서 열도로 전해졌다는 점에서 연구자들의 견해가 대체로 일치한다.
고분 시대 이해의 한계
전방후원분은 지역 호족이 야마토 정권과 맺은 관계의 표지였다고 해석되지만, 문헌 기록이 부족해 정치 구조의 세부는 고고학과 후대 사료에 의존한다. 따라서 이 시기 서술은 잠정적인 이해이며 새로운 발굴에 따라 바뀔 수 있다.
Sources · 참고 자료
- 『위지』 왜인전(『삼국지』 위서 동이전)
- 『송서』 왜국전
- 『일본서기』
- 『고사기』
- 광개토대왕릉비문(414년 건립)